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디 아민 (문단 편집) === 집권 이후 === || [[파일:external/noticias.starmedia.com/idi_amin_c748c8e7d9a80a97553a596861.jpg|width=100%]] || || 1975년 10월 1일, [[뉴욕]] [[UN|유엔]] 본부에서의 이디 아민.[*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의 의장 자격으로 유엔 총회에 참여했을 때의 모습이다. 이때 아민은 유엔 주재 대사한테 연설문을 대독하게 했는데, 이를 본 서방권 대표들은 야유를 퍼붓거나 회의장을 나갔다.] || 물론 아민은 위의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쿠데타로부터 약 1주일 후인 1971년 2월 2일에 스스로를 우간다 대통령, 육군 총사령관, 육군 참모총장, 공군 참모총장에 등극시켰다. 이후 아민은 집권 5개월 안에 헌법의 일부를 중지시키고 의회를 없앤 뒤 종교 집회를 제외한 모든 집회와 시위, 정당은 물론 노동조합, 학생 단체까지 포함한 단체 활동을 금지시킨 채 일반 법원보다 군법회의에게 압도적인 권한을 주고 정부와 국영 기업의 최고위직에 군인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사실상 문맹이던 아민은 장관들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꼈기에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해서 1972년부터는 각의를 단 한 차례도 열지 않았으며, 아민이 집권할 동안 우간다에는 [[선거]]라는 것이 전혀 치러지지 않았다.[* 다만 아민 집권 이전인 오보테 시기, 정확히는 1964년 이래로 우간다에는 선거가 없었으며, 우간다의 선거는 무려 '''16년''' 뒤인 [[1980년]]에야 다시 치러지게 된다. 참고로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치하의 [[에티오피아]](1973~1987. 다만 멩기스투의 집권은 1974년이다)는 14년 동안 선거를 치르지 않았으며,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치하의 [[에리트레아]](2003~현재)는 '''20년''' 동안 선거를 치르지 않고 있다.] 게다가 군사 재판을 거친다고 해도 거의 모든 재판은 제대로 된 절차조차 거치지 않는 약식재판에 불과했으며, 사법부의 독립도 군대가 재판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등 사실상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군법회의 의장으로서 군사재판을 총괄하던 육군 [[중령]] 겸 육군 총사령관 주마 부타비카[* Juma Butabika, ?~1979. 본명은 주마 알리 오카 로코니(Juma Ali Oka Rokoni). 이디 아민 아버지의 사촌이었으며, 초등 교육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고 한다.]는 워낙 악랄해서 친구들에게도 미치광이 취급 받은 인물이었는데, 이 인물의 별명 '부타비카'가 '부타비카 [[정신병원]]의 환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붙은 것에서도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부타비카는 수도 [[캄팔라]] 근교에 위치한 곳으로, 우간다 전체에서 가장 큰 정신과 병원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아민은 '국민을 위협하거나 경종을 울리거나 군부를 모욕하거나 불명예스럽게 만들기 위해 계산된 행위'에 대한 군법회의의 재판을 명령할 권리가 있었는데, 이는 지나치게 모호하게 정의된 혐의에 대해 자의적인 재판을 하도록 허락하는 권한과도 같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민의 정적들을 변호한 [[변호사]]들이 구금, 고문, 살해되거나 심지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거리에서 보안군에게 총살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민은 오보테 시절에 악명이 높았던 헌병대를 확대한 후 군인들에게 사법적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초법적인 무제한의 체포 및 수색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들은 '정치 활동'과 무장 강도 행위 등의 범죄를 행할 거라 '''의심되는''' 사람들도 영장 없이 체포한 후 재판 없이 강제로 무기한 구금시켰다. 심지어 아민은 야간 순찰대에게 눈에 보이는 대로 총을 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고는 이들이 무장 강도로 판단한 민간인들을 거리에서 [[즉결처분]]할 수 있도록 하여 밤에 거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도 이 군인들은 후에 '법과 질서와 공공 안전을 유지할 목적으로 한 일'에 대한 기소를 면제 받으면 그 기소 면제가 [[소급적용]]되어 이전에 저지른 악행들에 대해서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국가가 자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군인들이 [[묻지마 살인]]을 벌이는 것을 합법화한 것을 넘어 이를 오히려 장려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라디오는 게릴라를 숨기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잃고 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협박을 해댔고, 아민의 정적들은 낮에 공개적으로 납치 당했다. 때문에 아민에 반대하는 지하 조직도, 조직적인 반대도, 심지어는 정권을 비난하는 익명의 팸플릿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후술할 것처럼 아민이 집권하는 동안 반정부 시위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으로도 극도의 통제가 가해졌다. 모든 송수신 우편물들은 당국에 의해 검열되어 당시에 우간다에서 오고가는 모든 편지에는 대통령 관저의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고 하며, 전화는 공개적으로 도청되어 전화로 전달되는 내용이 '논란이 되면' 그 즉시 전화는 끊겼고, 언론 역시 극소수 빼고는 모두 폐쇄되었으며, 해외 신문을 읽는 것도 허가를 요구하는 사람까지 살해될 정도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아민에게 반대 의견을 표명하거나 그에게 반대하는 보고서를 작성한 언론인들이 체포, 망명을 넘어 살해되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심각하기 이를 데 없어 1977년에는 아민을 '모욕한' 연극의 대본을 쓴 작가와 그 연출을 연출한 연출가가 비밀리에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아민은 여성들의 도덕적 해이를 야기한다며 여성이 미니스커트와 가발, 심지어 바지를 착용하는 것조차 금지시켰으며 향수, 크림, 탈취제 사용까지 금지시켰고, 여성의 독신까지 금지시켜 군대로 하여금 독신 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하게 했다. 국민들의 자유로운 출국 역시 금지되었고, 외국에서 돌아온 우간다인들도 핍박을 당해야 했으며, 심지어 [[북한]]과 비슷하게 우간다 국내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위해서도 [[려행증|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1974년 우간다의 인권 실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에서는 "우간다에서는 양심, 집회, 결사, 이동의 자유는 사문화되었다."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1978년에 동일 단체가 동일 주제로 작성한 보고서에도 "우간다 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위해서도 특별 허가가 요구 사항이다."라고 언급된다.][* 여담으로 북한과 이디 아민을 제외하면 전국민에 대한 국내 여행 통제 제도를 실시한 지도자는 [[마시아스 응게마]], [[폴 포트]]처럼 '''이디 아민도 능가하는''' 악질 독재자들과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그나마 다행히도 이쪽은 일부 지역에 적용하는 것에 그쳤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처럼 극단적으로 억압적인 체제를 구축한 독재지들밖에 없다.] 아민은 이슬람교도와 특정 부족을 노골적으로 편애했는데, 카크와(Kakwa)족과 루그바라(Lugbara)족이 1977년까지 우간다 군대의 22명의 장군 중 60%, 내각의 75%를 구성했고, 인구의 5%에 불과했던 이슬람교도가 장군과 내각의 80%를 차지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